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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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된 국보 제329호로, 조선 시대 충청남도 공주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이다. 높이 315mm, 내부 직경 140mm의 원통형이며, 3단으로 분리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15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으며, 2012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세종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강수량 측정 전통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과학 기술 발전과 농업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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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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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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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
지정 종류 | 국보 |
지정 번호 | 329 |
지정일 | 2020년 2월 27일 |
시대 | 조선시대 1837년(헌종 3)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기상청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길 52 국립기상박물관 |
참고 | 규격: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 6.2kg 재질: 청동 형식: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된 원통형 측우기 |
추가 정보 | |
문화재청 ID | 11,03290000,11 |
2. 역사
1441년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는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만들어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1915년 일본 기상청에 옮겨졌으나,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다.[2]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3]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降雨) 측정기이다. 조선의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비합리적인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케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 과학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1]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는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따르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1자 5치, 직경 7치, 무게 11근(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 6.2kg)이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바닥면 명문에는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규격 사항은 이 측우기가 조선시대 측우기 제작 지침에 맞게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1]
- 측우기 중단의 명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높이가 1자 5치, 지름은 7치, 도광 정유년(1837)에 만들었고 무게는 11근이다.(錦營/測雨器/高一尺五寸/徑七寸/道光丁酉製/ 重十一斤)
- 측우기 바닥면의 명문: 입번은 통인, 급창, 사령이 담당함(入番通引/及唱/使令/次知)
원형의 청동 주물로 제작된 측우기는 하단, 중단, 상단의 세 단으로 분리될 수 있다. 하단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되는 구조이다. 사용 시에는 접합부에 납땜을 해 고정시켰으며, 과학적 조사 결과 중단과 하단의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접합부는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고도의 정밀한 형태로 고안되었음을 보여준다.[1]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비록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 그리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므로, 인류 과학사적 의미가 크다.[1]
2. 1. 측우기의 발명과 초기 역사
측우기는 1441년에 처음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제작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만들어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측우기는 원통형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있다. 원통형의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주척이라는 자를 사용하여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했다. 화강석 받침에 새겨진 글에는 1770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3. 구조 및 특징
1441년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는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만들어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측우기는 원통형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있으며, 주척을 사용하여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했다. 화강석 받침에는 1770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4]
3. 1.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구조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측우기이다. 원통형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있다. 빗물을 받는 원통형 그릇에 주척이라는 자를 넣어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했다.[1]측우기는 하단, 중단, 상단의 세 단으로 분리 가능한 원형 청동 주물로 제작되었다. 하단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되는 구조이다. 사용 시 접합부에 납땜을 하여 고정시켰으며, 이는 과학적 조사에서 중단과 하단의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된 것을 통해 증명된다. 접합부는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아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정밀하게 고안되었다.[1]
측우기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에 따르면, 1837년(헌종 3)에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평균 1자 5치, 직경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이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1]
측우기 중단의 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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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높이가 1자 5치, 지름은 7치, 도광 정유년(1837)에 만들었고 무게는 11근이다.(錦營/測雨器/高一尺五寸/徑七寸/道光丁酉製/ 重十一斤) |
측우기 바닥면의 명문 |
입번은 통인, 급창, 사령이 담당함(入番通引/及唱/使令/次知) |
3. 2. 크기 및 규격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중단 바깥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크기와 규격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에 따르면 높이는 1자 5치, 지름은 7치, 무게는 11근이다. 이를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하며,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1]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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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 명문 | 錦營(금영)/測雨器(측우기)/高一尺五寸(고일척오촌)/徑七寸(경칠촌)/道光丁酉製(도광정유제)/ 重十一斤(중십일근) |
내용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높이가 1자 5치, 지름은 7치, 도광 정유년(1837)에 만들었고 무게는 11근이다.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평균 치수인 높이 32.1cm, 지름 14.9cm를 주척(1자 206~207mm)으로 환산하면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高 1尺 5寸]와 직경 7치[經 7寸]'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측우기가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1]
원형 청동 주물로 제작되었으며, 하단, 중단, 상단의 세 단으로 분리되는 구조이다. 하단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되는 구조이다. 사용 시에는 접합부에 납땜을 하여 고정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과학적 조사를 통해 중단과 하단의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접합부는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고도의 정밀한 형태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1]
3. 3. 과학적 설계
높이 315mm, 내부 직경 140mm의 원통형으로, 높이는 1척 5천, 지름은 7촌으로 그 크기가 새겨져 있다. 3단으로 분리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4]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평균 치수인 높이 32.1cm, 지름 14.9cm를 주척(周尺, 1자 206mm~207mm)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高 1尺 5寸]와 직경 7치[經 7寸]'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측우기는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굳이 자를 대지 않아도 몸체가 대력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1]4. 지정 및 반환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조선 충청남도 공주감영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와다 유지에 의해 발견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에 반환되었다.[2]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3]
4. 1. 국보 지정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없이 측우기만 전해오고 있다. 조선 시대 충청남도 지역 감독 관청이었던 공주감영(금영)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발견되어 1915년 일본 기상청에 옮겨졌으나,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다.[2]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3]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까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1]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降雨) 측정기이다. 조선의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비합리적인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하게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 과학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1]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은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평균 1자[尺] 5치[寸], 직경 7치, 무게 11근이다.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하며,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바닥면 명문에는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규격 사항은 이 측우기가 조선 시대 측우기 제작 지침에 맞게 만들어졌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준다.[1]
측우기는 원형 청동 주물로 제작되었으며, 하단, 중단, 상단의 세 단으로 분리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단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되는 구조이다. 사용 시에는 접합부에 납땜을 해 고정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과학적 조사에서 중단과 하단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접합부는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고도로 정밀하게 고안되었음을 보여준다.[1]
이러한 점에서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비록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 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서 그 중요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 그리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므로, 인류 과학사적 의미가 매우 커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1]
4. 2. 반환의 의의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 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 그리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에도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류 과학사적 의미가 크므로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1]5. 관측 기록
6. 현대적 의의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에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 측정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1] 1971년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으며, 2012년 3월 20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3]
6. 1. 농업 생산성 향상에 기여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降雨) 측정기이다. 조선의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비합리적인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케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 과학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1]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비록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 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증빙한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서 그 중요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 그리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므로 인류 과학사적 의미가 크다.[1]
참조
[1]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20-23호(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 지정)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20-02-27
[2]
뉴스
測雨器의 행방
동아일보
1978-05-04
[3]
뉴스
日서 되찾은 조선의 진짜 보물이… 하나뿐인 '진품 측우기' 41년 만에 공개 기상청, 보물 '금영측우기' 23일까지 전시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2-03-21
[4]
논문
18세기 한국의 기후변동 -강우량을 중심으로-
1979
[5]
간행물
19세기 공주감영 측우기 강수량 18년 복원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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